문화연대 미디어문화센터 운영위원
‘동무’는 순 우리말로 ‘늘 친하게 어울리는 사람’을 뜻한다. 어깨동무, 길동무란 말에 동무의 흔적이 남아있지만, 남한에서는 ‘동무’ 그 자체로 쓰이는 일이 드물다. 북한에서 동무란 말이 일반화되며, 동무의 뉘앙스는 변하였고, 의미의 변화가 생겨났다. 말과 뜻 간에는 고정적인 관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맥락에 따라 새 의미가 추가되기도 하고, 기존 의미가 탈락되기도 함을 ‘동무’가 보여준다. 비슷한 예로 ‘동행’을 들고 싶다. 동행의 사전적 정의는 ‘같이 길을 감’이다. 함께 걸으며 오가는 대화를 통해 서로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쌓는 것이 동행이 아닐까. 그래서 최성수는 ‘누가 나와 같이 함께 웃어 줄 사람 있나요. 누가 나와 같이 함께 따뜻한 동행이 될까’라고 노래하였다. 허나, 요즘의 ‘동행’에선 이런 감정을 느끼기가 쉽지 않다. 대신 동행은 법률적 용어로 굳어졌다. 임의 동행, 참고인 동행 명령과 같은 사법적 뉘앙스가 동행 속에 더 짙게 베여있다.
동행이란 말보다는 ‘무한이기주의’란 말이 더 익숙하다. 1인자, 2인자를 왈가왈부하며, 내 한 몸 건사하기 쉽지 않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동행’을 말할 때 울리는 애틋함이 사라지는 현실은 그만큼 ‘함께 가기’가 힘들다는 반증일 터이다. 경제, 즉 먹고 사는 문제가 가장 큰 현실이 되었다. 외환위기 이후 빠르게 시장 질서로 재편되는 우리네 살림살이 속에서 동행은 참으로 향수적인 의미가 되거나, 아니면 사법적인 중립적 의미로 제한되어져, 애틋함의 불편함을 가려야만 쓸 수 있는 말이 되고 있다. 기실, 시장과 동행은 잘 어울리지 않는 말이기도 하다. 동행 속엔 이윤의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 우직함이 있다. 그가 나에게 손해를 주더라도 함께 가야 하는, 손익으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가치가 동행 속에 있으니 말이다.
KBS의 <현장르포 동행>은 그런 의미에서 우직하게 동행의 사라진 혹은 불편한 의미를 포착한다. <현장르포 동행>이 보여주는 이들은 우리가 볼 수 없는, 아니 우리가 애써 보지 않았던 1% 극빈층의 모습이다. 우리가 볼 수 없었다는 것은 이들이 시장의 바깥에 존재한다는 의미에서이다. 시장의 활력과 역동성은 구매력과 판매력을 갖는 이들의 활력과 역동성일 뿐이다. 시장에서 볼 수 있는 이들은 소비자와 생산자이지, 무산자가 아니다. 이들을 우리네 방송의 한 가운데로 데리고 왔다는 측면에서 <현장르포 동행>은 시장 바깥을 고민한다. 한편, 우리가 보지 않았다는 것은 시장이 시장 바깥의 존재를 은폐해야만 성립가능하기 때문이다. 시장질서 속에서 시장 바깥에 눈을 돌리는 것은 도태를 의미하기에, 우리는 시장 바깥을 보려하지 않았다. 그 와중에 우리 사회 1%의 극빈층은 고립되고, 소외되며, 지워지고 있었다. <현장르포 동행>이 보여준 이들의 실존적 궁핍함은 너무나 현실적이기에 초현실적이기까지 하다.
<현장르포 동행>이 그렇다고 지질히도 궁상맞은 무산자의 삶만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1%의 극빈층의 삶에도 존재하는 희로애락의 보편성은 이들이 시장의 낙오자일지언정, 결코 버려질 수 없는 인간적 동행자임을 보여준다. 고립을 동행으로, 소외를 관심으로, 지워짐을 복원으로 치유하는 시도 속에서 <현장르포 동행>은 시장 중심적 사고에 치명적인 균열을 내며, 시장의 실패를 강조한다. 시장의 논리로만 재단할 수 없는 공영방송의 사회적 책무를 <현장르포 동행>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 결국 ‘동행’의 오래된 의미를 되살리는 작업이 아닐까. (PD 저널 08/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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