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속 ‘젊은 리얼리즘’
2006/10/08 16:29
칼럼
광고는 청춘을 새롭게 창조해내는 일에만 그치진 않았다. 모두가 청춘을 꿈꾸는 소비자로 옮겨가도록 압박하기도 했다. 청춘이야말로 온 사회가 꿈꾸어야 하는 대상인 것처럼 포장해냈다. 노인도, 장년도, 어린이도 청춘이라는 범주야말로 가장 축복받은 것인 양 여기도록 꾸며냈다. 나이든 이들은 회춘을 꿈꾸고, 어린 사람들은 그 빛나는 범주를 하루라도 빨리 들기를 동경하며 모방하게 만들었다. 사회에는 다양한 연령층의 인구들이 있건만 모두가 머리 속에 청춘을 입력하며 살아가도록 광고는 주문을 해댔다.
이제 광고와 청춘은 뗄 수 없는 일란성 쌍둥이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자본주의 초기부터 시작된 광고의 큰 프로젝트가 이젠 관습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지금의 광고들은 그 관습을 반복하고 있다. 늘 새롭게 등장하는 젊은 캐릭터, 젊은 층의 새로운 유행을 선발해 관습에 얹으면 그만이었다. 젊은 리얼리즘을 다양하게 구성하는 것 외에 광고는 별 다른 창의성을 발휘하지 않고 있다. 청춘을 사업 아이템으로 잡고 새롭게 청춘을 구성해내자던 과거의 큰 프로젝트에 비하자면 지금 광고업계는 자잘한 프로젝트에 그치고 있을 뿐이다.
광고, 관습적으로 청춘 예찬…젊은 몸에 대한 욕망 부추겨
광고가 관습적으로 반복하는 청춘, 젊은 리얼리즘은 너무도 익숙해 긴 설명도 필요치 않다. 그 모습들을 간단하게 일별해보자. 그 첫째는 젊은 몸에 대한 욕망의 강조다. 광고 속 모델들은 젊을 뿐 아니라 그야말로 탱탱하기 짝이 없다. 그들의 몸은 노동으로부터 멀어져 있으나 노동으로 얻은 몸 보다 훨씬 더 세련되어 있고, 탐낼만한 대상으로 변해 있다. 소비만으로 가꾸어질 수 있는 몸, 헬스클럽을 소비해 멋있어진 몸, 화장품을 소비해 탄력 있어진 몸, 광고된 음식을 소비해 건강해진 몸, 비싼 의상에 휩싸여 더 멋있어진 몸으로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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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어서 즐거운 몸, 즐겁게 만들어야 하는 몸, 희노애락을 소통하는 몸, 보여서 즐거운 몸으로 광고는 젊음을 옮겨 놓는다. 광고는 늘 에로틱해 보이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부비부비 춤’을 싣지 못하는 몸은 사회로부터 소외되기 십상이다. ‘비 보이’를 해내지 않은 젊은 몸은 나무토막으로 별칭 된다. 섹시하지 않은 젊은 몸은 수도원과 연결되고 만다. 에로틱하게 역동적인 젊은 몸. 광고가 꿈꾸고, 꿈꾸게 만드는 젊은 리얼리즘이다.
광고 속 젊음은 진취성과 모험성으로 포장된다.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젊음으로 포장된다. 그래서 광고 속 젊음은 한국이라는 경계 안에 갇히지 않는다. 그 어떤 배경도 이국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지 않는 것이 없을 정도다. 미래형 생활 터전인 메트로폴리스가 배경이 되는 것도 같은 이치다. 젊음을 욕망하게 하는 광고들은 인간만의 세상에도 갇히지 않는다. 로봇을 부리고, 혹은 스스로 새로운 테크놀러지를 자신의 몸 안으로 초대하기도 한다. 그래서 늘 사해동포적인 것처럼 보인다. 늘 코스모폴리탄적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때론 사이보그적인 모습을 띤다.
지상파 방송 속의 주류 광고들에서 젊은 리얼리즘이 펼쳐지지만 이면에서는 낯선 풍경이 벌어지고 있다. 세월의 풍파를 겪은 나이든 모델들은 지역 홈 쇼핑 채널들에서 아픈 몸들을 과시(?)하고 있다. 무릎이 아프고, 위장이 편치 않아 걱정이라는 중년의 배우들이 온갖 약 봉지들을 들고 나기에 분주하다. 생약, 보약, 영양제, 보양식품. 고통으로부터 편해질 수 있는 온갖 방법들을 펼쳐놓기에 바쁘다. 늙은 리얼리즘은 제 한 몸 챙기기에 여념이 없는 이들로 채워지고 있다. 주류 광고 속 젊은 리얼리즘, 비주류 광고 속 늙은 리얼리즘.
매체와 광고의 공모
광고의 기운은 광고적 사건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광고의 기운은 그것이 앞뒤로 옥죄고 있는 프로그램 안으로도 전해지게 마련이다. 광고 속 젊은 리얼리즘은 어김없이 매체 속 젊은 리얼리즘으로 전이된다. 광고 탓만은 아니겠지만 방송 속 어디 한 곳, 젊은 리얼리즘으로 치장되지 않은 곳이 없다. 탱탱하고, 섹시한 몸, 주체하지 못하는 젊은 힘, 끝 간 데 없어 보이는 에로틱한 분위기, 새로움이라는 이름으로 어지러움을 선사하는 짧은 호흡의 유행이 넘치고 있다. 장르를 불문하고 그 기운은 흘러 넘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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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고향과 전통의 지킴이로 온정의 박수를 받는 객체로 인식된다. 한국을 벗어난 노인들의 해외관광은 사치이거나 보신관광으로 재현되는 것에도 우리는 익숙해있다. 전철에서 자리를 탐내는 사람들로 그려질 즈음이면 악의적 재현은 아닐까 분노도 솟구칠 정도다.
그나마 요즘은 방송 속에서 나이든 이들이 아예 모습을 감추었다는 지적도 빈번할 정도다. 젊은 리얼리즘을 풍부하게 해줄 스타를 기용하다 보니 나이든 연기자들에게 돌아갈 출연료 몫이 모자라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아예 부모 없는 젊은이들, 나이든 이들이 얼굴을 감춘 동네, 고향이 없는 등장인물들을 만나는 일이 허다하다.
광고하는 이들이 볼멘 목소리를 낼 지도 모르겠다. 매체에 돌려야 할 비판을 광고로 돌린 오조준이라고 말이다. 광고에게 그 같은 문화적 책무까지 떠넘기는 일은 과한 일이라는 역공을 해댈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면 광고에 가했던 표현을 조금은 완화시켜보자. 광고는 젊은 리얼리즘의 주변인은 아닐 수도 있다. 다만 광고는 매체와 함께 젊은 리얼리즘을 형성해내는데 공모하고 있는 듯 하다. 광고는 방송 프로그램의 앞뒤에 붙어 공모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젊은 리얼리즘이 온 사회에 흘러넘치게 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본 궤도에 안착하면서 시작된 청춘의 재구성이라는 큰 프로젝트가 아직도 큰 힘을 발휘하고 있는 셈이다. 지금의 광고인들은 그 큰 프로젝트에 젖줄을 대며 자잘한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을 뿐이다. 젊지 않으면 사회로부터 소외시키는 반 사회적인 그 프로젝트에 관습이라는 이름으로 무임승차를 하고 있다. 만약 광고를 하는 일이 정말 창의적이고, 사회를 위한 일이라면, 혹 그런 긍지와 책무감을 광고인이 지녀야 한다는데 동의를 한다면 제안을 해보고자 한다. 전 세기에서 벌였던 큰 프로젝트에 버금가는 큰 프로젝트를 한번 시행해보라고 제안하고 싶다. 무임승차적 관습이라는 굴레를 던져버릴 것을 권하고 싶다.
“사람이 사업”이라는 플래카드를 펼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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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몸이 부럽지만 어쩔 수 없는 한계를 인정하고 나이에 맞춘 몸을 사회와 더불어 가자는 사람도 있다. 시골에서 고향을 지키지만 과거 전통의 굴레로부터 한참 벗어난 채 살아가는 삶도 있다.
에로틱하지 않은 몸으로도 사랑을 지피고, 사랑의 소통을 향기롭게 펼치는 이들도 얼마든지 있다. 젊지 않음은 축복일 수도 있다. 그만큼 젊잖게 책임감 있게 사회에 자신을 펼칠 수 있기 때문이다.
젊은 리얼리즘에만 줄을 댄 광고가 다양한 연령층에, 그리고 다양한 연령층이 펼치는 다양한 삶들에 보급선을 댄다면 지금보다는 화려하진 않지만 건강하고, 풍부하지 않을까. 건강하고 풍부한 광고로부터 학습 경험을 한 이들은 방송 프로그램에도 그 같은 요청을 해내지 않을까.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광고는 매체와 전혀 다른 형태의 공모를 시작하게 된다. 오래 전에 시작된 그 낡은 큰 프로젝트를 딛고 서는 전혀 새로운 큰 프로젝트를 해낸 사회적 제도로 오래 동안 기억될 것이다. 그 쯤 되어야 광고인들도 사회에 기를 펴고 발언이라도 해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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