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피 브라운>과 한국 미디어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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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 캠페인 때였다. 당시 재선을 노리던 (아버지) 부시의 러닝메이트였던 댄 퀘일 부통령은 TV 시트콤인 <머피 브라운>에 시비를 걸었다. TV 앵커우먼인 주인공이 아버지도 없는 아이를 낳았다는 비난이었다. 편모슬하에서 자란 아이들이 나중에 사회적으로도 문제가 된다는 말도 서슴치 않았다. 댄 퀘일의 발언에 온 미국이 뒤집혔다. 맞는 말이라는 측과 웃기는 보수 꼴통이라는 측이 맞섰다.
사건이 커진 데는 당시 댄 퀘일 부통령이 대표적인 조롱거리 정치인이었던 탓도 있었다. 자니 카슨 쇼, 데이비드 레터만 쇼 등 심야 토크 쇼는 그 이전에도 연일 조롱거리로 댄 퀘일을 끌어다 즐기곤 했었다. 그러나 그 발언으로 온 나라가 들썩였던 가장 큰 이유는 12 년에 걸쳐 펼친 공화당 정권의 가족 정책을 둘러싼 찬반 논쟁 때문이었다. 가족에 대한 책임을 국가에 돌리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를 놓고 공화당과 민주당은 서로 엇갈린 주장을 펴고 있었다.
댄 퀘일의 발언으로 증폭된 가족 논의는 그 해 대선에서 중요한 선거 이슈가 된다. ‘가족의 가치(family value)'를 놓고 공화당과 민주당은 온갖 선거 캠페인에서 부딪쳤다. 공화당은 도덕적 가치와 사회적 책임감을 강조하며 전통적인 가족의 가치를 주장했다. 그에 비해 민주당은 다양한 가족 유형을 인정하고, 그 가족들이 온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국가의 몫이라며 ’가족의 선택‘과 가족 복지를 강조했다.
'가족의 가치'가 대선 주요 이슈로 발전하게 된 데는 미디어의 역할이 컸다. 신문, 대중잡지, 라디오, 텔레비전 뉴스, 시사토론, 심야 토크쇼, 심지어는 코미디 프로그램, 어느 매체랄 것도 없이 한 마디씩 거들었다. <뉴욕 데일리 뉴스>는 1면에 “퀘일이 머피 브라운에게 : 야, 이 쓰레기야”라는 놀라운 헤드라인을 실었을 정도다. 미국 부통령 역사에서 댄 퀘일만큼 미디어의 조명을 많이 받은 부통령은 없을 거라고 다들 말하곤 했다.
댄 퀘일이 시비를 걸 때 시트콤의 제 1부 시리즈는 이미 끝나 있었다. 주인공 머피 브라운이 남자 아이를 낳는 것으로 마감되었고 제 2부 시리즈 방영을 앞두고 있었다. 댄 퀘일의 발언 이후 곧 이어 제 2부 시리즈가 방영되었다. 제 2부 첫 번째 에피소드는 ‘복수혈전’에 가까웠다. 머피 브라운은 아이를 안고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텔레비전은 편모슬하 자식을 비난하는 부통령에 관한 뉴스를 방영하고 있었다. 화가 머리 끝 까지 치민 머피 브라운은 다음날 자신의 프로그램에 나가 부통령을 비난하고 훈계까지 날린다.
실질 정치와 TV 시트콤이 메비우스의 띠처럼 맞물리고, 그를 보고 즐기며, 또 정치에 참여하는 미국 미디어선거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당시 나는 학위논문 통과 후 마지막 손질을 하고 있었는데 <머피 브라운> 덕에 피곤함을 달랠 수 있었다). 2부 1편 방영 후 댄 퀘일은 시트콤 속에서 태어난 그 아이에게 공화당의 상징인 코끼리 인형을 선물로 보내기도 했다. 댄 퀘일은 자신이 미국의 모든 가족에 호의적이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2부 첫 번째 에피소드를 한 흑인 편모 가족과 함께 시청했다고 한다.
그 해 선거에서 전통적 가족 가치 대신 ‘가족의 선택’을 강조한 민주당이 승리한다. ‘문제는 경제’라는 프레임으로 클린턴이 이겼던 것으로 기억들을 하지만 ‘가족의 가치’도 승패에 영향을 줄 만큼 큰 이슈였다. 한 작은 사건이 이슈화되고, 대선의 큰 쟁점으로까지 발전하는 과정에 전 미국이 다 참여하고 있었다.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코믹하게, 때로는 격렬하게, 때로는 가볍게, 이런 저런 식으로 온 사회가 동참하고 토론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 ‘미디어’가 있었다.
미디어 선거란 그런 것 아닐까? 저널리스트들이 나와서 후보자들의 말 한마디도 꼬투리 잡고, 그를 빌미로 주요 쟁점도 만들어 보고. 혹 실언이라도 나오면 개그 콘서트도 한번 써먹고. 라디오에서는 김구라가 살짝 비꼬아주기도 하고. 정책과 연결될 만한 얘기라면 온 사람들 다 끌어내서 토론도 붙여보고. 그런 것 아닌가? 그렇게 되면 선거방송심의위원회가 너무 바빠질까? 미디어가 그렇게 활발하면 유권자들이 불편해할까? 한국의 미디어들은 선거 시즌만 되면 꽁꽁 얼어붙거나 제 정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 댄 퀘일은 <머피 브라운>을 떠 올리며 한국 정치인들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한국인이어서 행복하시겠어요."
덧말 : 댄 퀘일은 감자 부통령으로도 유명하다. 미국의 교육을 걱정하던 그는 한 초등학교를 찾는다. 부통령 앞에서 아이들은 영어 받아쓰기 경연을 벌였다. 한 아이가 선생님이 불러준대로 칠판에 '감자(potato)'를 올바르게 적었다. 이 때 그 걱정많은 부통령은 아이를 측은하게 쳐다보며 '애야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겠구나'라며 철자를 고쳐준다. POTATOE. 머피 브라운 사건과 감자 사건 이후 댄 퀘일은 몇 번의 재기를 노렸다. 그 때마다 토크 쇼 사회를 보는 코미디언들의 입심을 이겨내지 못하고 정치 무대에서 멀어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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