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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 미학

2008/01/24 02:04 칼럼

서강대학교 커뮤니케이션학부 원용진 교수
http://airzine.egloos.com


광고의 미학적 측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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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는 상품의 지표다. 지표란 기생적 운명을 지닌다. 광고도 마찬가지다. 상품이 존재하지 않은 채 광고가 존재할 수는 없다. 하얀 눈 위의 선명한 발자국이 사람이 지나갔음을 알리는 지표이며 지나갔던 사람에 예속될 수밖에 없듯이 광고도 상품에 예속된 존재다. 기생적 운명, 예속 등의 표현은 창조의 산물 가운데 유독 광고에만 주어지는 불명예인 듯하다.


다른 창조적 산물들은 기생적 운명이나 예속이라는 굴레로부터 자유스럽다. 문학작품은 얼마든지 존재하지 않은 가상적 현실을 바탕으로 자신의 세계를 펼치는데 익숙하다. 미술작품들의 추상성도 엄청날 정도여서 과연 어떤 존재물을 그려낸 것인가 모르기 일쑤다. 음악의 경우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안타깝지만 창의성을 강조하는 광고물은 전혀 그런 자율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상품과 관련 없는 광고물을 창조했다간 자칫 그 존재가 위협받는 지경에 이를 수도 있다. 그래서 광고는 자율을 누리지 못하고 속박된 슬픈 존재로 인식된다.


존재론적 슬픔은 사회적 제재라는 전혀 다른 슬픔에 비하면 나은 것인지도 모른다. 창의성을 노래하되 상품에 기반한 창의성이 아닐 경우 광고에는 어김없이 사회적 제재가 다가온다. 창조물 중 허위라든지, 과장이라든지 하는 혐의를 뒤집어 써야 하는 경우는 광고 말고 무엇이 있으랴. 사전 심의 없이는 방송이 불가능한 분야는 광고물이 유일하다.


방송 광고물 사전 심의를 두고 표현의 자유 침해라는 볼멘 목소리를 내 보지만 공허할 뿐이다. 누구도 귀담아 들어주지 않는다. 존재론적 속박이 연장되어 사회적 규제로까지 이어지고 있으니 광고야 말로 눈물 젖은 창의성 영역이라고 부르지 않을 도리가 없다. 창조적 행위를 펼친다는 광고인의 자존심에도 그래서 늘 찜찜한 부분이 남는다.


표현물인 광고를 상업적 메시지로만 한정 짓는 것은 광고를 위해서나 그를 안고 있는 사회를 위해서나 유익한 일은 아니다. 표현물인 한 그것의 자율성은 인정되어야 한다. 인정을 넘어서서 광고 이미지가 인간의 감각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음도 수긍되어야 한다.


광고를 항상 상품에 종속되어 있다고만 여긴다면, 그리고 그 평가를 상품과의 관계에서만 행해낸다면 표현이라거나 창의성이라든가 하는 용어들을 광고인들은 빨리 포기하는 편이 낫다. 표현의 영역을 지키고 있으며, 여전히 사회 내 구성원들의 미적 감각을 고민한다는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면 다시 표현, 재현, 자율성, 감각 등을 광고와 연관해 논의해야 한다. 이는 광고인들의 자존 그리고 정체성과도 관련된 부분이기도 하다.


광고인들을 상업인으로만 규정하는 일은 어리석어 보인다. 상업적인 측면을 부정할 수는 없으나 그것만으로 정체성을 논의하기엔 미흡한 면이 있다. 미학적인 면, 인간 감각과 관련된 면을 건드리지 않고서 광고, 광고 이미지, 광고인의 정체성을 논의하기엔 미진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적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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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물, 재현, 예술 등에 대한 논의의 출발은 불가피하게 아테네 학당의 선사들에 기댈 수밖에 없다. 플라톤이 그 시작점이다. 이 철학자는 표현물이나 재현물 중에서도 최고의 가치로 치는 예술에 대해 상당한 적대감을 보였다. 예술은 실물의 모방(mimesis)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파악했다. 그리고 실물은 실물들의 최고 이상향인 이데아의 하위 범주로 파악했다. 모든 인간 행위가 이데아를 향하고, 이데아란 최고의 위치를 가진 것이었다.


이데아가 가장 높은 곳에 있다면, 그 다음에는 실물, 그 아래에는 실물을 흉내 낸 재현, 표현물, 예술이 있었다. 표현하고, 재현하는 일은 언제나 그 대상으로 얼마나 더 가까운가 아닌가로 평가받았다. 아무리 가깝게 모방되었다 하더라도 실물이라는 존재를 넘어설 수는 없지만 말이다. 그의 논의에서 애초부터 재현, 표현이라는 행위가 끼어들 여지는 없었던 셈이다.


플라톤의 제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재현의 지위를 그의 스승과는 다르게 설정한다. 재현도 그 자체로서 가치를 가질 수 있음을 당당히 선언한다. 재현물이 실물과의 닮고 안 닮고를 떠나서 사람들의 심금을 울릴 수도 있음을 설파한다. 카타르시스를 줄 수 있는 재현물, 예술 등이 가능하지 않으냐는 반문이다.


이 때 재현물은 실물과의 관계에서 평가되는 것이 아닌 독자적 영역을 가진 사회적 제도로 인정받는다. 이로써 예술, 재현물, 표현물에 대한 전과 다른 논의가 가능해졌다. 이후 예술과 재현물에 대한 논의는 플라톤적인 것과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것으로 나뉘지만 균형 발전을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예술의 자율성에 더 큰 점수를 주는 아리스토텔레스적 경향이 강했다. 재현을 통해 오랫동안 가려져 왔던 실물의 내면 깊숙한 진실을 알 수 있게 만들어주는 예술을 높이 평가하는 비평도 많아졌다. 심지어는 모방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이른바 시뮬라크라(simulacra)의 가치조차도 높이 평가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최근의 미학 논의 경향과 광고의 운명론적 한계를 종합해보면 다음 같은 결론에 이를 수 있다. 상품으로부터의 자율성을 창의적 산물인 광고가 주장할 수는 있지만 그럴 경우 자신을 부정하는 모순에 빠진다. 완전한 자율성을 내세울 순 없는 셈이다. 만약 광고에서 예술성이나 미학적 가치를 찾고자 한다면 부분적 자율성에 걸어 논의할 도리 밖에 없다.


상품과 연결고리를 놓치지 않으면서 예술성을 펼치는 모습이다. 이제 기생이나 예속이란 말 대신 다르게 표현할 방식을 찾아야 할 것 같다. 광고가 비록 상대적이고 부분적이긴 하지만 자율성을 가지는 존재라면 그에 상응하는 미학적 라벨을 붙여주는 친절함도 필요하지 않을까.


하이데거는 고호의 <구두> 그림을 놓고 의미부여를 시작했다. 아리스토텔레스적 경향의 하이데거는 고호의 작품이 구두를 모방했다거나, 구두를 잘 드러내고자 한 것이 아니라 구두가 지닌 진실을 꿰뚫게 해주는 역할을 수행했다고 보았다. 실물 자체에는 은폐되어 있던 진실이 재현을 통해 빛을 보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재현이 혹은 예술작품이 실물에 생명을 주고 있으니 플라톤의 실물과 재현의 지위관계는 역전이 되는 셈이다.


고호의 <구두>가 없었다면 과연 구두라는 수단이 지닐 수 있는 그토록 위대한 진실을 우리가 알 수 있었을까. 비록 상품이라는 실물에 연을 대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지만 광고가 그 같은 지경에 이르는 일을 불가능한 것일까. 상품 표피를 훑어주는 광고가 아니라 그 속까지 꿰뚫어 전해주는 그런 미학적 도구로서의 광고는 생산될 수 없는 것일까.


사회의 문지방 넘어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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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가 뛰어난 표현, 예술 등에 무관심했던 것은 아니다. 자신들이 궁극적으로 행해야 할 지점으로 설정한 예들도 얼마든지 있다. 예술작품을 등장시키거나 그를 패러디하면서 광고들은 예술작품에 대한 동경(憧憬)의 속내를 드러내기도 했다. 예술의 경지를 꿈꿨지만 그에 이르지 못한 신세 한탄일 수도 있다. 얼핏 얼핏 광고 속에서 보이는 예술 작품이나 고전 영화의 오마쥬(hommage)도 그런 맥락에서 볼 수 있다.


광고가 사회적으로 대접받기 위해서는 사회적 인식이나 그에 기반한 제재를 딛고 일어서는 일을 뒤로 미룰 수는 없다. 하지만 동시에 광고인들의 무의식으로 남아 있는 자조(自嘲)를 떨치는 일도 우선 순위에서 앞 세워져야 할 사안임을 잊어선 안 된다. 기생이나 예속이라는 형용어를 광고 속에서 걷어 내는 일이 더 미뤄져선 안 될 일이다.


광고는 이미지를 만들어 사회에 떠돌아다니게 하는 이미지 탱크다. 그것이 바로 광고 이미지가 사람들의 감각을 어떻게 어루만지고 있는지를 고민해보아야 하는 사회적 이유다. 자조를 털고 자존을 세우며 미학적 고민을 펼치는 것이 바로 광고가 사회의 문지방에 들어서는 모습이다.


몇몇 공익적 내용을 앞세운 캠페인성 광고들은 이미 그런 경지에 이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상투적인 캠페인임을 넘어서서 인간관계의 정곡을 찔러내는 광고도 몇 편 본 적이 있다. 지나치게 잘 만들어지고 미학적 성찰까지 곁들어져 있어 상품을 제대로 지칭하지 못하지 않을까 우려가 될 정도였다. 상품의 지표성 역할을 잘 하지 않았을 때 광고의 당혹감은 너무나 잘 알기에....


상품 미학이라는 영역을 창안해낸 하우크는 광고가 소비 감각을 자극하는 미학을 구성해내고 있다고 비판한 바 있다. 그가 문제 삼은 것은 창의성을 지닌 재현체로서 광고가 소비 감각만을 강조하고, 다른 감각의 자극, 확장에 눈을 돌리지 않았다는 점 때문이다. 잠재된 감각을 자극해내고, 그를 확장하는 일을 광고가 해내지 못하란 법은 없다. 예술이나 다른 재현에는 - 상품과의 관계에서 생긴 존재론적 한계 탓에 - 미치진 못하겠지만 그 역할의 가능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광고가 펼쳐낸 부정적 방향의 미학적 발견들도 많다. 수없이 많은 다양한 클로즈업을 통한 인간 육체의 상품화 등이 바로 그 예다. 여성의 몸을 조각조각 분해하고 그에 따라 분절적으로 사고하고 분절적으로 감각케 하도록 유도해갔던 광고들이 그 적확한 예가 아닐까. 그 이면에는 성의 자유분방하게 인식하고 감각케 한 이미지 운동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 움직임은 여성을 객체화하는데 눌리고 말았다는 점에서 부정적 방향이라고 규정한다.


부정적 방향은 인간 능력의 확장보다는 어느 한 편으로 쏠리게 하고 궁극적으로 도착적으로 감각케 하는 것을 의미한다. 긍정적 방향은 당연히 쏠림보다는 다양함, 도착보다는 애정과 차이에 대한 인정 등으로 규정된다. 광고가 미학적인 측면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져 준다면 광고의 사회적 지위도 높아지고, 사회가 얻는 혜택들도 많으련만 아직 그에 도달하려면 넘어야 할 장애들이 많은 듯하다.


광고인들의 자조적 무의식도 떨치고, 미학적 논의도 도입해야겠고, 광고의 정체성 변화도 꾀해야 하니 이래저래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사회적 산물이 사회적 이익을 보고도 어려움 때문에 뜻을 접는데서야 어디 체면이 설 수 있을까. 어렵지만 한번 내질러 볼 일이다. 광고인들의 분발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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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Z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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